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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트 메스너 이야기

2012/01/16 20:04
라인홀트 메스너는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파르바트의 8,000미터 연봉들을 그는 대원 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호텔 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면서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 외로움에 슬픔이 섞여 있는 한 그는 산속 어디에선가 죽을 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 뿐이다. 그는 산으로 가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한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의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김훈, 자전거 여행, (생각의 나무, 2000) p81-82. 

장종혁 노르웨이의 나무 라인홀트 메스너

백일의 transit

2011/10/05 22:31
9월 25일 저녁, 나는 지금 홍콩 공항에서 transit 대기 중에 있다. 이곳 게이트 앞에서 보딩을 하려고 대기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아니 사실은 그들의 키를 보면서), 
홍콩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개가 네덜란드인인 듯 하다. 모두 노랗게 창백한 그리고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고 북극의 타는 태양같은 머리색을 한 이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귀국하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다시 암스테르담에 돌아가는 사람이다. 
어느 장소든, 100일이 넘게 머무른다는 것은 그곳에 적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민간인과 군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신분이 합의점을 찾는 지점이 100일 휴가이듯 말이다.
최소한의 적응기간의 상징이 100이란 숫자에 있다. 지금껏 내가 100일을 머무른 타국의 도시는 두 곳이다. 암스테르담과 뉴저지. 물위의 도시와 숲 속의 도시, 안식의 장소인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는 장소. (네덜란드인에게 물은 친구인 동시에 적이라는 말도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하는 곳이 암스테르담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었다. 형체가 잡히지 않는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친근함이 공존하는 도시, 그러한 곳에서 100일을 넘게 머무른다는 표현은 어쩌면 transit이라는 말보다 더 무거운 언어가 필요할 지 모르겠다.

장종혁 오랑쥬 껍질 씹기

문법 규정에 대해, 비트겐슈타인 227p, <언어 게임>

2011/07/11 20:37
<철학 논평>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문법 규정들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기술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색깔이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색깔언어는 어떤 규정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색깔의 속성에 대한 기술은 그 자체가 문법 규정들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들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 만약 그것이 문법 규정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마디의 헛소리이거나, 아니면 그 규정들이 피상적임을 보여줄 것이다. (<철학 논평> 53,55) 

그러나 단어를 위한 우리의 규칙들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상 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아니다'에 대한 우리의 규칙들이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또 그 단어의 의미와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규칙이 없으면 단어는 의미가 없으며, 만약 우리가 규칙을 바꾸면 그 단어는 다른 의미를 갖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문법> 184; <철학적 탐구> 147). 문법 규칙들이 임의적이라고 주장하기를 원하는 것은 이런 유혹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러나 이것 역시 완전히 옳지는 않다. '왜 나는 요리 규칙은 임의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문법 규칙은 임의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을 받는가?'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묻는다.

'요리'는 그 목적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말하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의 사용은, 요리와 세척이 그렇지 않은 그 어떤 의미에서, 자율적인 이유이다. 당신이 요리 중에 올바른 규칙이 아닌 다른 규칙들의 인도를 받는다면, 당신은 요리를 형편없이 한다. 그러나 당신이 체스 규칙이 아닌 다른 규칙들을 따른다면, 당신은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러저러한 규칙이 아닌 다른 문법 규칙들을 따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틀린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당신이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 문법> 184; <쪽지> 320)

 언어는 특수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발명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우리가 미터 체계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피트와 인치의 체계를 사용하는가가 어떤 측량의 목적에 중요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개념을 사용하는가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총괄적으로 언어 밖의 상술 가능한 특별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언어의 규칙이 임의적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게임의 규칙이 임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게임이라는 개념은 게임이 우리에게 미치게 될 영향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철학 문법> 192). '문법의 목적은 단지 언어의 목적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문법 규칙은 "임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적 탐구> 제 1부, 497)

장종혁 오랑쥬 껍질 씹기 언어게임

질그릇에 담긴 보물

2011/07/11 19:51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완전해진다는 것 (고후 12:9)을 기억한다면, 오류 투성이인 인간을 하나님의 계시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가운데 여가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의 상황에 자신을 맞추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성을 존중하시는 가운데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신다. 계시의 빛은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우리에게 떨어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가운데 세상적인 매게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데, 성령께서는 책임적인 해석과 비판적인 수용의 과정에서 인간의 참여를 유도하신다. 계시에 대한 모든 인간의 증언이 모호성과 왜곡의 위험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계시가 수용되는 과정을 변증법적인 과정 dialectical process 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 조직신학개론, 70p

하나님의 능력은 강한 가운데에서 완전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가운데에서 완전하여진다. 연약함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일하는 것이 성도가 취할 자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언제나 그런 연약함에 기대어 나약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변증법적인 피드백 feedback 을 통하여서 연약함으로부터 강함 가운데로 나아가는 스텝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연약함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요, 강함을 주장하여 인간을 기계처럼 강인함에 맞추어 사는 강압적인 방식도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 나의 모습 그대로인 실존으로부터 놀라운 능력의 자리, 거룩함의 자리로 한발 한발 baby step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이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God is kind but not soft 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계산하시고 그곳에서부터 출발하도록 그 자리의 상황에까지 함께 내려오시는 은혜와 겸손의 하나님이시지만, 정체되어 있는 자기반복적인 모습에는 엄격함을 보이는 아버지요 튜터 tutor 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단은 겁먹을 필요가 없다. 두려움을 사랑과 은혜가 모두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안일해져서도 더욱 안될 것이다. 은혜는 각 사람에 대한 균형이다. 연약함 가운데에서 은혜를 의지해서 한발 한발 걸어가야 하는 것,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경외하는 것, 나태하지 않으면서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 그럼에도 하나씩 행동과 사고양식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가며 변증법적인 사다리를 완성해가는 것. 
야생의 동물도 자신이 놓친 먹잇감에 대해 자신의 행동양식을 성찰한다. 완성되지 못한 것, 미완의 것에 안주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장종혁 오랑쥬 껍질 씹기 계시, 다니엘 밀리오리, 조직신학

비가 내리면 박수치는 소리가 들린다

2011/07/04 21:38

비가 내리면
박수치는 소리가 들린다

손 한 뼘 다른 한 뼘이 만나
소리를 만들듯

비가 내리는 시간은
하늘 한 뼘 땅 한 뼘이 만나
박수를 치는 시간이다

땅은 원래 
하늘의 다른 한 뼘이라는데

그 뼘이 지저분할 때가 참 많아
이다지도 비가 내리는가 보다

그런데 이상하지, 관중이라도 있는지 

다른 그 한 뼘 씻기우는 때마다
박수갈채 소리가 하늘에 땅에 가득하다

장종혁 저녁의 꼴라쥬